백범 김구의 일대기, 일생, 업적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1세대 보수정당 정치인이다.
1919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참여하였고
1940년에는 임시정부의 주석에 선출되어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광복 이후에 남북 분단에 반대했고 남북의 통일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1949년 반대측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타임 히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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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07월 11일김구 출생 황해도 해주의 백운방 텃골
백범 김구 선생은 1876년 7월 11일 자시(子時: 23~01시), 황해도 해주의 백운방 텃골에서 안동김씨 순영(부친)과 곽낙원(모친)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구 출생시기 당시에 진통이 생긴지 6~7일이 되었는데
아이가 나오지 않아서 부친 순영은 지붕위에 올라가서
소의 길마를 머리에 쓰고 소 울음 소리까지 내었다고 한다. -
1879년4살의 어린 나이에 천연두로 갖은 고생
4살, 1879년 천연두에 걸려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때 얼굴에 생긴 고름을 김구의 어머니께서 죽침으로 빼내셨는데, 그때의 흉터로 인해 김구의 얼굴에는 굵은 마마자국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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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12세에 글공부를 하여 양반이 되기로 한 김구
백범 김구는 12살이 되어서야 글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늦게나마 글공부를 하기로 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어느 해, 집안 문중에 혼인이 있었는데
문중 일가 할아버지 한분께서 서울에서 사다두었던
관을 쓰고 새 사돈을 맞이 하였는데이 광경을 지나가던 양반이 보았고
그 양반이 관을 부서뜨린일이 있었다고 한다.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김구는
과거에 급제하여 양반들로부터의 모욕과 천대에서
벗어나고 상놈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마음 먹었다고 한다. -
1890년정문재에게 한당시, 대학, 통감, 과문 등을 배우다
김구는 15세에 정문재의 서당에서 한당시, 대학, 통감, 과문 등 본격적인 한학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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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17세에 과거(임진경과)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였다
백범 김구는 17세에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이었던 임진경과(壬辰慶科)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부패할대로 부패한 조선조 말기에는 매관매직이 다반사..
돈 많은 양반집 자제들이 자리를 차지 하였고 가난한이들에게는 그저 그림속 떡일뿐이었다.결국 과거에 낙방하여 백범(김구)은 큰 실망과 좌절과 회의를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시절 실의와 좌절에 빠져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각종 병서들을 읽으며 마음을 달래었고
이 시기에 황해도 해주 일대에도 동학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널리 펴질때이고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못했던 백범(김구)에게 강력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
1893년18세에 오응선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다
동학에 큰 관심을 갖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오응선을 찾아갔다.백범(김구)은 상놈으로서의 천대와
유교적 통념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맞이해주어 크게 당황하였다고 한다.백범(김구)은 오응선에게 동학의 내력과 도리를 배우고
동학의 평등주의를 경청하고 평등주의야 말로
상놈의 한을풀 수 있는 획기적 사상이라는 생각으로
동학에 입도하였다.동학에 입도한 백범(김구)은 누구보다 열심히 교리를 배우고 익혔으며
포교 활동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하였다.입도한지 몇달만에 연비(포교로 얻은 신도)가 수백 명이 되었고
이때에 [아기 접주]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고 한다.이 시기에 백범(김구)은 이름을 [김창수(金昌洙)]로 바꾸었다.
1893년 말경에는 갯골의 동학도인 오응선과 최유현의 추천으로
황해도 도유사의 한명으로 선발되어
충북 보은에서 해월 최시형 대도주를 만나게 되었다. -
1894년 04월19세에 팔봉접주 첩지를 받아 팔봉접이라는 부대를 구축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군사를 일으키고
어느 고을에서는 관리들이 동학도인의 전 가족을 잡아 가두고
재산을 강탈하는 횡포가 심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이 보고를 들은 해월(최시형 대도주)은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워야지"
라는 말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였는데해월(최시형)의 이 한마디는
동학혁명군의 동원령이나 다름없었고
이에 전국 각지의 대접주들이 모여
각자의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이때 백범(김구) 일행도 해월(최시형)으로 부터
팔봉접주의 첩지를 받고 해주로 돌아왔다.돌아왔을 때 이미 이 지역에서는
군사를 일으키자는 동학도인들의 의견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한다. -
1894년 09월백범(김구)은 700여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해주성을 공략하였으나 실패
백범(김구)는 자신의 부대이름을 팔봉접이라고 명하고
군사를 모았는데 휘하에는 총을 가진 사냥꾼들이 많이 모여서
700여 명의 무장된 군사를 모집할 수 있었다.동학군의 총사령부에서는 해주성을 공격하여
탐관오리와 왜놈들을 벌하라는 내용과
해주성 공격의 선봉장으로 백범(김구)를 추대한다는
내용의 작전계획을 하달하였다.이렇게 1894년 9월 7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해주성을 공략하였으나
생각치도 못할만큼 강력하게 무장된
관군과 일본군의 총격에 후퇴하게 되어
동학군의 해주성 공격은 실패로 끝이 난다. -
1895년20세 안태훈(안중근의 부친)을 찾아가 고능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895년 초에 백범(김구)은 안태훈의 산채로 피신을 하게 되었고
안태훈의 소개로 고능선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능선에게 각별한 애호를 받으며
구전심수를 통해 주자학적 애국사상과 민족주의 교육을 받았다.청과 일본의 세력을 끌어들여
자기 나라의 백성들을 진압하는 조정의 모습을 본
김구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이 때 만난 고능선의 가르침을 통하여 다시금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고 한다.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이 있던 해이다.
일본은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 했던
고종의 가장 큰 조력자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대신으로 내각을 구성하는데 성공하였다.을미사변 이후로 한민족의 일제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고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불타오르게 되었다. -
1896년 05월 11일토전을 처단하고 해주옥에 수감되다
백범(김구)가 만주로 여행을 떠나 있는 사이에
고능선의 사랑방을 찾아온 백범(김구) 아버지에게
고능선이 백범(김구)과 자신의 장손녀 약혼을 시키자고 제의..여행에서 돌아온 백범(김구)는 이를 모르고 있다가
유학자의 손녀사위가 된다는 것에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지만..백범(김구)의 아버지가 10여년 전
술자리에서 취중농담으로
김치경이라는 사람의 딸과 백범(김구)을 결혼시키자고
언약한 일이 있었는데그 당시 백범(김구)이 그 혼사를 극구 반대하여 성사되지 않았었고
김치경의 딸도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갔었던 일이 있었다.그런데 김치경이라는 자가 고능선의 집에 찾아가서
백범(김구)은 자신의 딸과 이미 정혼을 한 사이라고
행패를 부려서 결국 혼사가 성립되지 못한다.해주성 공격에도 실패하였고
그토록 기뻐했던 고능선 장손녀와의 혼사도 성립되지 못했던 심정..울적한 심정으로 만주로 갔는데
만주에서 고종의 아관망명(아관파천: 1896년 2월) 소식과 함께
단발령을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보고정세의 변화를 본국에 머물면서 관망하기로 마음을 바꾸고
안악으로 되돌아 오던중에 대동강 하류의 치하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다음날 아침에 주막에서 아침식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확실히 일본인인데 황해도 장연에 산다고 하고
흰두루마기를 입고 신분을 숨긴채
흰두루마기 속에는 군도를 숨긴자에게
어디를 가냐고 물어보니,진남포로 간다고 대답하였는데
보통 장사를 하거나 공업을 하는 일본인이라면
변복을 하고 이름까지 바꿀 이유가 없을텐데
이런 수상한 면을 보아하니최근 명성왕후를 시해한 삼포오루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 일당이라고 생각한
백범(김구)은 그를 해치우기로 마음 먹는다.설사 그 일당이 아니라고 해도
저놈은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한 놈..
국모의 원수를 갚아 하나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결국 그 일본인을 처단하게 되었는데
소지품을 조사해보니 죽은 일본인은
토전양량이라는 일본 육군중위였다.그 소지품중에 800냥의 엽전도 있었는데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집으로 돌아와 이 일을 부모님께 아뢰었는데
부모님은 몸을 피하라고 말했지만
백범(김구)은 나라를 위해 한일이니
떳떳하고 비겁하게 피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오히려 집에서 태연하게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결국 그 일이 있은 뒤 석달 후인
1896년 5월 11일 새벽에 체포되어 해주옥에 수감되었다.그 당시 심한 고문을 받았는데
그때에 생긴 상처가 훗날까지도 흉터로 남게 되었다. -
1896년 07월백범(김구) 해주옥에서 인천 감리영으로 이송되다
7월 초순 인천 감리영으로 이송 되었는데
옥사의 시설이 말할 수 없이 불결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장질부사(장티푸스)까지 앓게 되었다.어느 날 밤 다른 죄수들이 잠든 사이
이마에 손톱으로 충(忠)자를 새기고 허리때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끝내려고 까지 했었다.백범(김구)은 인천 감리영에서 3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다.
심문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일본인 관리에게 말하기를
"이이놈,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화친이라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왕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폐하를 살해(을미사변, 1895)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없이 해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
라고 호통을 치자 일본인 관리는 당황한 기색으로
대청 뒤로 사라져 버렸다.이런일이 생기자 관리들은 이 사건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백범(김구)의 심문을
경무관이 아닌 감리사 이재정으로 하여금 직접 담당하도록 하였다.이재정에게도 백범(김구)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 김창수(김구)는 일개 하향 천생이지만 국모폐하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을미사변, 1895)를 당하고는 청천백일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폐하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蒙白 ; 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는 것)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을 잊어버리고 한갓 영귀와 관록을 도적질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오."
이런 백범의 뜻있는 행동들이 그를 심문하는 관리나 옥사장, 일반백성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되었고 그를 면회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그 후 백범은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고종의 특사령으로 사형이 중지되고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